![]() 가장 보편화되어있는 종교의 성서에는 '바벨탑'이라는 인간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건축물이 등장합니다. 인간들은 모두 힘을합쳐 신에 다가가고자 바벨탑이라는 하늘에 닿는 건물을 쌓게 되지만 바벨탑에의해 신의 분노를산 사람들은 통일된 언어를 잃게되어, 결국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의(바벨탑을 만들 수 없는 규모의) 집단으로 분리됩니다. 영화 바벨은 이러한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와서 '의사소통의 부제'에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영화에는 몇가지 흐름이 공존하고, 그 각각의 흐름속에서 각자의 대립항이 존재하게됩니다. 각각의 흐름(이야기)는 모두 중심에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을 그려놓고, 그안에서 모든 괴로움을 펼쳐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전반적으로 매우 답답하고 불편합니다. ![]() 이런 여러가지 이야기를 배치함에 있어서 감독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비선형적인 병렬배치를 할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두가지는 '전체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없다'라는 점과 '다른이야기의 뒷부분이 궁금해서 보고있는 이야기가 흥미가 떨어진다'는점입니다. 둘중 어느 한쪽이 찾아오게되면 관객이 가장 크게 느끼는건 '지루함'입니다. 이해가안되니 지루한건 당연하고, 이야기가 가지는 힘이 균형을 잃으면 상대적으로 약해진 부분에서 관객은 지루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치만 적어도 바벨은 두가지현상의 어떤부분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전체이야기의 연결이 어렵지 않음은 물론이고, 각 이야기가 가지는 힘과 시간의 배분이 절묘해 긴 러닝타임내내 충분한 몰입도를 가져옵니다. 대립관계는 의사소통에 문제만 일어날 수 있다면 가리지 않고 발생합니다. 심지어는 함께 자라온 형제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그렇지만 주목해야할것은 그 대립관계의 해소에 있습니다. 똑같은 진폭으로 끌고나간 다수의 이야기는 조금씩 연결고리가 생겨가며 서로 반응하고, 그 반응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갑니다. 부부는 용서함으로서 소통하고, 보모는 사건 담당자와의 대면 대화를 통해 소통합니다. 형과 문제로 사건을 발생시킨 아이는 죽어가는 형을위해 모든걸 버림으로 소통하며 의사소통의 문제의 극단점이라 할 수 있는 벙어리가 마음의 소통을 이뤄낸 직후, 만나지 못하던 형사와 벙어리의 아버지는 만나서 진실을 이야기 함으로서 소통합니다. 이 마지막 소통으로서 모든 이야기가 풀리며, 동시에 올바른길로 돌아옵니다. ![]()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것은 '경계라는것은 어떤 정의된 선 혹은 지점이 아니라는점'입니다. 경계라는 단어에는 억지성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어떤 두가지를 가르는것은 예외없이 양극단의 두가지가 섞여있는 모호한 공간을 나타냅니다. 현재는 미래와 과거의 사이일뿐이고, 국경도 국경이라는 인위적 선을 중심으로 국내와는 성격이 다른 공간이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영화 바벨의 경계도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의사소통을 해내지 못하고 각자의 극단점에서 서로를 향해 부딛히기만 할것같지만, 사실은 모호한 경계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섞여져나가 결국 올바른 소통의길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공간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유기적 결합이기에, 그 자체로 이 세상 전체라고 생각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언급한것 이외에도 다양한 내러티브를 담고있지만, 이 마지막 소통의 대단원은 정말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니까요. ps. 저는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창세기의 하느님 말씀 '참 아름답구나'라는 것이 전제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안좋은 이야기라도 그 바탕은 '이 세상은 아름답다'가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생각이 바벨을 보며 적용되었을 가능성은 무척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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