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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토토로 미야자키하야오의 세계는 일관적이다. 이미 수십년을 관통하고 있는 그의 작품세계는 그 작품이 언제 제작했던, 그 제작시기의 세상이 어떤 모습이었던,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은 언제 어떤것을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항상 일관적인 모습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늘 새롭고 즐겁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의 작품은 항상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 환상성의 반복으로 인해 계속해서 비슷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수 많은 작품들 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비슷하게 느껴지기는 커녕 모든 작품들이 별개로 놀랍게 다가온다. 그는 보편타당한 사실을 그려내지만, 그것은 환상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당연하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볼 수없는 우리에게 순수한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세상을 다시 보는 눈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미 지브리의 간판스타가 되어버린 토토로는 그러한 세상의 모습 중 꿈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직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어린 아이들을 중심으로 모든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풀어간다. 그리고 그 꿈과 믿음은 보는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상상력과 즐거움을, 또한 어른들에게는 좀더 순수했던 시절에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사가던 첫날 이삿짐 정리를 도와주러 오신 할머니는 신이난 아이들에게 이야기 한다. '나도어렸을적엔 검댕이가 보였었는데‘. 이 영화상의 어른들은 이런 꿈을 꾸는 듯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호의적이다. 어쩌면 현실적이지 못하지만, 꿈을 꾸기에 밝고 힘차게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그 꿈의 발산을 받아주고, 더욱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 할머니가 이야기 해주는 -어두운데서 갑자기 밝은곳으로 가면 보이는 ‘마쿠로 쿠로스케’라던가, 폭풍우가 치는 날 밤 아버지는 크게 웃으면 무서움이 달아난다고 이야기 해주는 것. 그러한 호의적인 모습은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욕망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꿈을 잃어버리는 것만이 아닌 그것을 쉽사리 무시해버리고 경시해버리게 된 세상속에서 느끼는 아쉬움. 그렇게 무시하고 경시 해선 안될 세상의 일부인 꿈과 믿음이 지켜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인 것이다. 그래도 역시 토토로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아직 꿈이 크고 믿음이 강한 어린아이들이 만들어가는 환상의 세계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일지도 모른다. 시작부터 영화는 ‘아이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들’로 꾸며진다. 마쿠로 쿠로스케 라던가, 토토로들, 그리고 고양이 버스까지, 모든 것들은 아직 꿈을 꾸고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아이들의 눈에만 보인다. 그리고 영화 내에서 믿음의 힘은 굉장한 위치를 차지한다. 메이의 토토로 발견에서부터 고양이버스의 목격, 심어놓은 나무열매에서 나오는 싹, 메이를 찾고, 어머님의 상태를 확인하기까지 모든 사건들은 그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믿음을 잃는순간. 메이는 사라진다. 어느날 갑자기 날아온 전보로 인해 사츠키와 메이는 불안해한다. 그 불안은 아무런 걱정이 없는듯 했던 두 아이에게는 너무도 크게 다가온다. 잠시 집을 찾아온 이웃집 할머니에게 사츠키는 그냥 가벼운 감기라는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목격한 메이는 사라져버린다. 모든 부분에서 꿈과 믿음에 의지하면서도 토토로는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고 계속해서 증거를 남긴다. 토토로가 정류장에서 주고가는 나무열매 씨앗, 병원 창문에 놓여있는 옥수수는 그것이 꿈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영화의 중반에 나무 열매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아이들은 외친다. ‘꿈이었는데 꿈이 아니었어!’ 이 대사는 토토로의 모든 것을 가르쳐준다. 꿈이지만, 꿈이 아닌것. 진실로 원하고 꿈꿔온 일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타 작품에서 일장춘몽으로 그려질 법한 주제속에 수많은 현실적 증거를 남겨놓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식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법을 가르쳐준다. 우리가 커가면서 어느샌가 무시하고 경시하게된 꿈이라는 요소는 결코 그렇게 무가치 한 것이 아니라고, 그것을 믿는것엔 원하는 것을 달성하는 힘이 있다고 계속해서 강조한다. 또한 그것을 강조하면서도 판타지로 거부감없이 너무도 행복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잃었던 무언가를 마음에 채우는 듯한 느낌까지도 준다. 일본은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감독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이만큼 당연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소재를, 보는이가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 마음속에 채워넣어 줄 수 있는 감독은 세계어디에서도 찾기 어렵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미야자키의 작품은 일본의 문화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있다. 신앙적인 부분에서 보면, 나무신을 모신곳에서 나무신이 나오고, 고양이 신을 모신 정류장 앞에선 고양이 버스가 등장한다. 더 나아가 센과 치히로, 그리고 그러한 일본 신앙의 총합을 보여준 원령공주는 또 어떠한가. 일부에선 ‘귀신문화’로 다소 섬뜩하게 표현되는 이런 일본의 특징들을 미야자키는 장점으로 승화시켜 작품속에 녹여둔다. 관객들이 어떠한 거부감도 느끼지 못하는 형태로 말이다. 어쩌면 이런 신앙이 근거되기 때문에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강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 자체의 신앙과 관계와는 무관하게 꿈과 희망, 그리고 믿음은 당연시되는 진리이다. 그것이 당연한 만큼 경시되고 있지만 말이다. 이 작품을 보고 아직 마음속에 따뜻함이 남아있다면, 조금 더 꿈을 바라보고 그것을 믿으며 살아보는 건 어떨까? 우리는 현실적이라는 이름하에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사는것은 아닐까? +사실 써놓은지 조금 된 글입니다. 모군 친구의 부탁으로 숙제 대용으로 써준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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