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서생. 음란으로 그려낸 세상만사
어찌보면 시작은 진부하다. 뭔가 새롭고 대단한 것을 시도하는 것 같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어느정도 '제대로된 사극'이라는 것은 하나의 컨텐츠로 확고히 자리를 잡은 형상이고 이 영화의 색또한 처음이 아니다. 바로 본 영화의 감독이 직접 각본을 썻던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로 우리에겐 익숙한 색의 영화이다. 더욱 새롭지 못한것은 바로 지금. '왕의남자'라고하는 걸출한 영화가 한국영화의 관객동원기록을 깨려는 순간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초기 홍보하던 '선비의 음담패설'이라는 소재는 그다지 와닿질 않는다. 그다지 자극적이지 못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음란이라는 단어. 이 단어에서 느껴지는 감각의 장점은 원색성. 즉 강렬한 색상에 있다. 이런점에서 영화의 선택은 아주 훌륭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스캔들'과 같이 조선 남녀의 사랑을 기반으로 그려내면서도 음란서생은 그 제목에서부터 차별을 주며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 단어의 원색성을 이용하여 영화는 한 극단의 예술적 감각을 보여준다. 흔히 한국적이라 불리우는 단아함, 우아함은 이 사극에서는 크게 보이지 않는다. 오직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감각은 '강렬함' '몽롱함' '웅장함'등의 강렬한 예술적감각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은 전통적 사극의 감각보다 되려 최근의 흐름과 동일성을 보여준다. 더 많이, 더 크게, 더 강렬하게, 어쨌거나 더욱 많은것. 전혀 자극적이지 못해보이던 영화의 소재는 재발견되어 더욱 자극적인 작품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 재발견은 '스캔들'이 했던 사극의 재발견에서 이어지는 '재발견의 재발견' 이기에 더 의미가 있다.

영화는 예술을 이야기한다. 세트부터 촬영, 그리고 모든 소품하나하나에 그 아름다움이 뭍어난다. 무척 강해졌지만 여전히 잃지 않은 한국적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을 유지한채 황실, 사대부집, 기방, 상점등을 원색적인 색감과 선명한 채도로 강렬하게 그려낸다. 비록 그 아름다움이 캐릭터를 향할때는 '정빈'이라는 캐릭터에 한정되지만, 영화의 중심은 정빈이기에 그것은 자연스러워진다.

비단 이런 예술성이 외형적인 사물과 자극에만 국한되는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영화의 진면목은 이야기가 이끌어내는 예술의 성격에 있을지도 모른다. 윤서역의 한석규는 그야말로 정결한사람이다. 자신의 가족이 당해도 이것이 선비의 법도에 '올지않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항소하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한치의 오점도 없고, 또 그 오점이 없는 삶을 살다보니 적극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게된 그렇고 그런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게 특기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조선최고의 명문가'라는 것이다. 사회가 옳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글이라는 방식으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윤서'의 인생은 그가 보지 못한 세상을 발견하고선 묘한 욕망에 휩쌓이게 된다. 그 묘한 욕망은 '작가'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고, 그는 그렇게 새로 발견한 세상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적 감각의 진 면목을 발견하고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의를차리고, 직접적이지 못한 글을 쓰던 그는 처음으로 사람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직접적인글을 작성하기 시작하고, 그 글의 평이 더욱 높아지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음담패설들이 자신의 안에서 극에 달하자 이젠 새로운 예술적감각을 내뿜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바로 '삽화'이다.

미디어적으로 봤을때 바로 이 삽화는 '멀티미디어'의 시작이다. 예술로 보자면 '종합예술'이 되는것이다. 바로 이 종합예술의 시초는 윤서를 그릇된 길로 이끌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말하듯이 '꿈을 꾸듯이, 마치 직접 본듯이'라는 이 음담폐설의 방점은 바로 '~듯이'에 찍혀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그것이 현실이 되어선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삽화는 이미 머리속으로 상상하는 세상을 눈으로 보여주기에 이른다. 직접 눈으로 보기 시작한 세상은 어느센가 그의 현실에 위치한다. 그들은 소설과 삽화를 위해 다양한 체위를 스스로 시연해가며 만들어가기 시작하고, 삽화를 그려주는 '광헌'에게 는 아예 실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가지 현상은 정점에 달해, 급기야 정빈을 끌어내 스스로 시연해가며 그림을 그려낸다. 이것은 바로 현실과 상상의 전도현상이다. 상상을 돕기위해 그려낸 그림은 도리어 현실을 잡아먹고 표현에 머무르게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종합예술 그 자체를 스스로 욕하는 비관적 자세로 끝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그곳에서 흐름을 끊어 두 남,녀의 사랑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끌어낸 뒤 영화의 끝까지 이 미디어의 발전상을 보여준다. 글은 그림을 포함하게 되고, 그들의 체위 시연은 소리를 포함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결국 '동영상' 즉 영화라는 현대 기술의 총아를 언급한다.

이 영화를 끌어나가는 또하나의 내면은 인터넷과 현실의 유사성에있다. 윤서는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필명'을 만들어 낸다. 이는 인터넷세상의 '아이디'와 같다. 그리고 영화는 '댓글'이라는 형태로 그러한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존재는 필요하되 본명을 밝힐 수 없자 필명을 만들어 활동하고, 그 필명속의 윤서는 아주 음란하고 포악하기 이를데 없다. 자신의 본명이 아닌 필명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평소 드러내지 못하는 온갖 음란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그 필명이 사용되는곳. 즉 황가(오달수)의 그릇가게에서 온갖행위를 해나가는 것이다. 필명의 그가 존재하는 바로 그 공간은 현대의 우리들이 활동하는 어떤 한 커뮤니티와 다르지 않다. 자신이 감춰져있다는 이유로 많은 악행을 하는것이다. 그리고 그 악행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화살이 향해지고, 윤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크나큰 상처를 입힘으로써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꿈을 꾸듯이, 마치 직접보듯이'에서 '~듯이'에 방점이 찍혀야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점과 연결된다. 현실과 가상을 혼동해선 한된다고, 그렇게되면 화를 입는다고 영화는 계속해서 말한다. 인터넷을 살아가는 너희들은 그렇게 행동해선 안된다고. 하지만 진짜로 영화가 이야기 하고 싶은것은 '그래선 안된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왜 그렇게해선 안되는지'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필명과 실명이 공존하는 공간, 바로 그릇가게가 있기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결국 그 가상세계는 현실과 직접 연결되고 그 가상은 결국 현실로 자신앞에 드러나지 않는가. 그런데다가 그런 혼동적문제점을 계속해서 고발하면서도 영화는 양쪽모두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끌어나가지 않는가.

결국 끝에가선 낙인이 찍힌채로 계속해서 아니 더욱 창조적으로 작업하는 윤서를 보여준다. 잘못한 자는 응당한 벌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세상을 포기 할 필요는 없다. 더욱 창조적으로 여유있게 세상을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마지막 윤서가 언급하는 것은 '동성애'와 '동영상'이다. 두가지 모두 우리시대를 대표하는것 아닌가. 동영상은 미디어의 총아로 세상을 이끌고 있고, 동성애는 음지에서 나와 움트고있는 새로운 문화적 컨텐츠다. 이런 모습은 좀처럼 보기힘든 개방적 결말이라 더욱 흥미롭다. 어떤가. 이 세상(인터넷세상을 포함한)속에서 좀 더 창조적으로 살아가는것. 좋지않는가. Fin
by 도모에 | 2006/03/04 18:08 | 영화와 생각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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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아르테미스 at 2006/03/07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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